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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생활/2011

무사히 살얼음을 건너고.. - 2011.12.11-12.17

by 삼포친구 2011.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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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3차항암 3주차 외래일..
2주차때 바닥을 치던 혈액수치들이 대부분 정상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고열로 인한 입원도 없이 무사히 살얼음판을 건너고 있다.

지난주에 혈소판 1회 수혈과 촉진제 1회 밖에 투여를 안했는데..

몸이 항암제를 이기고제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번엔 약처방도 고혈압약 하나밖에 없다.
그동안 빠뜨리지않고 먹었던..

- 푸루나졸정 150mg 1정 (항진균제)
- 무코스타정 100mg 1정 (항역류제, 항궤양제)
- 루리드정 150mg 1정 (감염예방약)
약들이 모두 빠졌다.

암환자가 먹는 약이 고혈압약 한가지라니..
혹시 혈액수치가 오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잘 되었다.
다시 생김치를 먹을 수 있다니..

오후에는 시골친구(성칠이)가 멀리서 얼굴이 보구싶다며 집으로 왔다.
만류했지만 막무가내식으로..
오랫만에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근처 생맥주집에서 생맥주와 치킨을 사서 먹이는데..
"환자가 왜 그런 자리에 가 있느냐?"며 아내가 불같이 화를 낸다.
친구가 점심도 안먹고 먼길을 와 준것이 고마워서 사주는 것 뿐인데..
아내는 내가 걱정이 된 모양이다.

최근에 회사에서 지급한 갤럭시탭에서는 시골친구들 4명이 들어와서 열심히 채팅중이다.
자기들끼리 올해 송년회는 우리집 근처에서 할 것이니 참석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괜찮을 것 같다고 대답을 했는데..
이것 역시 아내는 반대다.
사람들 많은 일반 음식점에 가는 것이 세균감염 위험성이 높다는 것이다.
나도 그말은 인정하지만.. 친구들이 보구싶은 마음도 위험을 무릅 쓸 만큼 크다.

결국은 눈치 빠른 친구가 내년에 만나는 것으로 하고 나의 송년회 참석은 없던 일이 되어 버린다.

혈액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면 항상 다투게 된다.
나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고.. 아내는 이를 통제하려고 하고..

오늘도 만찬가지였다.
혈액수치가 정상범위에 들어왔다고 곧바로 정상인처럼 행동한 내가 문제였다.
내가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것에 실망을 했는지..
저녁을 먹으면서도 아내는 계속 훌쩍 거린다.
내가 조심해야지.. 나 믿고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인데..
여보 미안해.. 당신말 잘 들을께..

12월 15일..

3차항암의 살얼음판을 무사히 건넜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힘들게 자라다 만 짧은 머리카락이 항암제의 독성을 이기지 못하고 잔뜩 빠져있다.
피부도 건조하고.. 거울을 보니 얼굴도 거칠거칠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아직도 어색하지만.. 과거의 모습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암이라는 것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
가끔은 사람을 슬프게도 만든다.
사소한 일에도 혼자서 눈물 글썽이는 일이 많아진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생활하다가도.. 한순간에 미래가 깜깜한 암흑세계로 바뀌기도 한다.
어떤이는 철학자가 된다는데..
깜깜한 미래를 생각하면 앞일을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절로 힘이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늘을 열심히 살고.. 즐기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오늘 당장.. 아니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고 싶고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12월 16일..

병을 얻고 보니.. 환자를 대하는 친구들도 부류에 따라 다름을 느끼게 된다.

시골친구들은 업무상으로는 관련이 없지만..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환자를 환자로 대하지 않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친구로 대하려는 경향이 있다.
계속 문자 보내고.. 전화하고.. 만나자 하고.. 아내가 짜증을 내며 귀찮아 할 정도로 보고싶어 하는 게 느껴진다.
반면에 대학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은 냉정하다.
전화문자 조차도 뜸하다. 만나자는 친구나 동료도 거의 없다.
그야말로 병명이 정해지는 순간부터 볼 필요가 없거나.. 다시는 못 만날 사람으로 판단을 한 것처럼 잡았던 손을 너무 쉽게놓아 버린다.

내가 환자가 되고 나서야 백혈병으로 먼저 간 친구가 얼마나 외롭게 갔는 지 이해가 된다.
나도 그 친구를 외롭게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가기전에 그 친구에게 보구싶다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개도 오지 않는다"는 속담이 틀린 말이 아님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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