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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생활/2012

고민 - 2012.10.14-10.20

by 삼포친구 2012.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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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4일째 회사에 출근한다.

특별히 맡은 일이 없어 하루종일 빈둥거린다.

오늘은 무료함을 견디기 어려워 원자력학회에서 발행한 후쿠시마사고 분석보고서를 읽으며 하루를 보낸다.

작년 3월 11일 일본 동남부대지진의 영향으로 쓰나미가 발생하고 후쿠시마사고가 일어났다.

국내외 원자력계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사고가 어느정도 진정되고.. 사고영향평가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즈음에..

내게도 대형 쓰나미가 밀려왔다. 

병이 났다.

뭔가 해야할 일이 많이 있었는데.. 

병마와 싸우느라 세상 돌아가는 일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처지가 너무 한심했었다.

전장에서 무장해제 당한 군인처럼 그렇게 한여름을 보내고..

이제 남들이 정리한 보고서만을 읽고 있다.


특별한 일을 하지않고 그냥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도 피곤한 일이다.

하긴 집에 있을 때는 매일 1시간정도씩 낮잠을 즐기곤 했으니..

하루 8시간이 너무 지루하게 지나간다.

담배를 안하니.. 커피마시는 횟수도 줄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횟수도 줄었다.


어떤이는 다가와서 "휴가를 더 쓸수 없는가" 하고 묻는다.

환자와 일하기가 부담스럽다는 의미인지.. 회사를 그만두고 몸 건강에만 신경을 쓰라는 의미인지..

나 또한 애매모호하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자니 자신이 없고.. 소극적으로 행동하자니 자존심이 꿈틀거린다.

어찌해야 하나..

명예퇴직도 머릿속에 맴돈다.

벌어놓은 돈이라도 넉넉하다면 주저없이 명예퇴직을 고려할 만도 한데.. 

고민이다. 

일단 3개월을 다녀보기로 한다.

앞으로 10여년간 회사생활을 할 것인지.. 

명예퇴직으로 전원생활을 할 것인지는 그때가서 결정해야 할 것 같다.


10월 17일..


3개월만에 정기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는다.

하루하루 날짜가 다가올수록 골수검사에 대한 스트레스도 커진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병원으로 간다.


혈액검사를 하고.. 골수검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골수검사를 받는 분이 M3 발병한 지 5년이나 되었단다. 

궁금한 것이 있어 이것 저것 물어본다.

지금까지 골수검사는 무려 20회 정도..

항암때 하고.. 3개월마다 하고.. 6개월마다 하고.. 그러다 보니 5년간 20회란다.

앞으로 1년만 받으면 끝날줄 알았는데.. 이제 7번째인 나는 앞으로도 10여 회를 더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어쨋든 5년간 성공적으로 항암을 견디어 온 것이 이제 1년을 조금 넘긴 내겐 너무 부러운 사실이다.

두려움이 되기도 하고 희망이 되기도 한다.


골수검사후 대개 2시간이면 지혈이 되는데.. 

무슨 원인인지 지혈이 되지 않아서 거의 3시간동안 지혈을 했다.

혈액수치는 정상적인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길옆의 담쟁이와 단풍나무잎이 눈길을 끈다.

어느새 또 가을이다.

지난 가을은 사지에서 살아 돌아와서 맞는 소중하고 절실한 가을이었는데..

이번 가을은 조금은 편안한 안도의 가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음 검사일은 2013년 1월 9일로 잡혔다.


(골수검사후 지혈중)


10월 19일..


복귀한 지 열흘이 되어간다.

아직은 회사에서도 특별히 일을 맡기지 않는다.

맡은 일없이 어영부영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하루종일 컴퓨터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러다 지치면 핸드폰을 꺼내 친구들과 카카오톡을 즐긴다.

하루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진다.

오전시간은 그럭저럭 버티다가 오후시간이 되면 낮잠이 몰려오며 피곤해진다.

집에서 쉬는 동안 낮잠을 자던 생체리듬이 아직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어영부영하느니 차라리 한두가지 일을 맡아서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으니 어느정도는 회사에 기여해야 할 것 아닌가?

날개 꺾인 새가 이런 모양이며.. 이빨 빠진 호랑이가 이런 모습일까.. 

의욕은 사라지고.. 

답답함을 호소할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퇴근시간이 되면 어깨를 늘어뜨리고 무의미하게 퇴근을 한다.


퇴근후에 시골 친구들을 만난다.

내가 아플때나 건강하게 회사에 복귀한 후에나.. 항상 변하지 않고 안부를 물어주고 반겨주는 친구들이다.

시골 친구들이 좋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았다. 

나는 잘 먹지도 못하는 닭발집에서 만났는데.. 잘들도 먹어댄다.

낮에 피곤하고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10월 20일..

어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한친구가 눈이 충혈되었다고 알려줬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오른쪽눈 흰자위의 절반이 빨갛다.
걱정은 되지만 시력에는 이상이 없다.
얼마전 혈액검사에서 혈액수치도 괜찮았으니 그 영향도 아닐테고..
오전에 안과를 찾는다.
안구의 모세혈관에서 출혈이 발생했다고 한다. 
고혈압환자들에서 많이 발생하는 현상이란다.
에휴.. 이제 서서히 종합병원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나마 심각한 질환이 아님에 감사해야 한다.

병원에 다녀와서 미용실에 간다.
병이 생기고 나서 흉한머리로 이발소에 가기 싫어 집근처의 미용실에 아내와 함께 찾은 것이 처음인데..
벌써 세번째.. 
이제 단골이 되어간다.
회사 이발소에 가면 1시간이나 걸리는 데.. 신기하게도 10분 만에 완벽하게 끝낸다.
빨라서 좋다.
깔끔한 머리 만큼이나 마음도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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