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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생활/2012

수류화개(水流花開) - 2012.01.08-01.14

by 삼포친구 2012.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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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8일..

병을 얻고 나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다.
항상 내일이 주어질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지만..
건강할 때는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적어도 나의 미래가 20년이상은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앞으로 항암치료에 의한 후유증없이 2년간 버틸 수 있는가?
그 다음 5년간 잘 보내고 완치판정을 받을 수 있는가?
그 후에 다시 재발없이 몇년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렇다면 나의 미래를 가정한 계획이 무의미 할 수도 있다.
답답한 마음에 책을 한권 잡아 들었다.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라는 법정스님의 잠언집이다.
시형식으로 짧게 짧게 그분의 생각을 적어놓은 책이다.

그분이야 한평생을 무소유로 살았으니.. 죽음에 무슨 미련이 남았으랴..
책의 내용 중 많은 부분에서..
"삶에는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지금 이순간 만이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의 구절이 많이 보인다.
내가 지난해 8월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리라고 상상을 못했듯이..
지금 내가 건강하다고 해도 그런 상황은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미래가 확실히 남아 있다는 착각속에 살아 온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다는 것은..
지난 어제를 뒤돌아보며 후회에 구속되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지 않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 "수류화개(水流花開)"가 마음에 와 닿는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듯 한순간도 멈추지 말라"
이는 내가 평소에 좌우명을 삼았으나 실천하기 어려웠던 "나날이 새롭게"와도 같은 말이다.
남의 말을 그대로 옮길 줄만 알았지 그 뜻이 이렇게 새롭게 다가올 줄이야..

1월 10일..

외래가 있었다.
혈액검사를 하고 담당교수를 만나 진료를 받는데..
혈액검사 결과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콜레스테롤과 혈당 수치가 좀 높다고 한다.

담당교수의 진단도그렇고.. 백혈병 진단 전에는 없던 증상들이니 아무래도 항암치료의 후유증인 것 같다.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처방이 추가되었다.

아침, 저녁 식후에
- 오마코연질캡슐 (동맥경화용제)
인터넷을 뒤져보니..
고농축된 '오메가-3 지방산'을 함유한 약으로 고지혈증 치료 및 심근경색 예방약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오려는데..
요즘 자주보는 KBS2 TV 인기드라마 Brain을 촬영 중이다.
주연인 신하균(이강훈역)과 최정원(윤지혜역)도 보인다.
거리는 좀 멀지만 휴대폰을 꺼내들고.. 사진 몇장을 찍고 집으로 돌아온다.

1월 12일..

창밖이 밝다.
눈을 비비며 거실에 나와보니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시간은 9시를 지나고 있다.
하늘이 맑다.
베낭을 짊어지고 어디론가 떠나기에 알맞은 날씨다.
뉴스에서는 바깥날씨가 매우 춥다고 하는데.. 집안에서 있으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하기만 하다.

아침식사를 하고.. 12시가 다 되어 욕실로 들어간다.
항암으로 인해 혈액수치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을 때이니 위생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샤워를 하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겨드랑이도 그렇고.. 다른 부위도 그렇고..
항암에 지쳐 조금 남아있는 체모의 모양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소년이 서있는 모습이다.
4차항암 직전까지 손바닥이 벗어지더니.. 지금은 발바닥이 벗어지고 있다.

오후에는 구정선물을 사서 시골집에 택배로 보내자는 말을 꺼냈다가..
명절날 가지도 못하는데 선물은 무슨 선물이냐며 핀잔을 주는 아내의 말에 머쓱해서 저녁내내 입을 닫아 버렸다.
왜 그렇게 돈이라면 벌벌 떠는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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